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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밥의 원형이 되는 일본의 후토마키(太巻き) |
오늘날 한국에서 통용되는 김밥은 일본의 노리마키(海苔巻き), 그 중에서도 간사이 지방에서 발달한 ‘후토마키(太巻き)’에서 유래되었다. 직역하면 각각 노리마키는 ‘김을 만 것’, 후토마키는 ‘두껍게 만 것’이란 의미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전래되었고, 해방 이후 경제 성장기를 거치며 한국에서 현지화, 변형된 것이 김밥이다.
물론 김 자체는 한반도에서도 삼국시대 신라 시기부터 먹은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기록과 《본초강목》을 보면 “신라의 깊은 바다 속에서 채취하는데, 허리에 새끼줄을 묶고 깊은 바다 속에 들어가서 따온다. 4월 이후로는 대어가 나타나 해치기에 채취를 할 수가 없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 당시 김 자체는 양식이 아닌 채취 하는 형태이기에 상당히 귀했다. 고려시대 부터는 시중에 유통과 보관 특히 선물 공물 진상을 위해서 종이 형태의 판김인 ‘해의’가 등장한다. 고려 말기 조선 초기 시대에 목은 이색의 시에 강릉절도사가 보내준 해의에 대해 감사하다는 내용에 있으며, 공물 진상물으로써 백성들의 고충이 있다는 내용의 기록들이 조선실록에 있다.
한국 내 김 양식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1424년에 집필된 《경상도지리지》로, 조선 후기부터 김 양식 통해서 마른 김이 판김 형태로 유통 및 진상되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판김을 기름에 구워서 먹었고, 밥이나 다른 곡식을 김에 싸먹는 김쌈도 먹었으나, ‘쌈’이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 지금의 김밥과는 형태가 다소 달랐다. 당시의 김쌈은 말 그대로 상추쌈이나 배추쌈처럼 판김에 밥과 나물을 넣어서 손으로 쥐고 먹는 형태였다. 1800년대 말엽에 지어진 《시의전서(是議全書)》의 김쌈에 대한 기록을 보면 “김쌈은 김을 손으로 문질러 잡티를 뜯는다. 손질한 김을 소반 위에 펴 놓고, 발갯깃으로 기름을 바르며 소금을 솔솔 뿌려 재우고 구웠다가 네모반듯하게 잘라 담고 복판에 꼬지를 꽂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현대 김밥의 본질적인 형태인, ‘김밥말이(마키스)라 불리는 대나무발 위에 김을 깔고 그 위에 밥을 편 뒤 속재료를 얹고 돌돌 마는 방식의 요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일제 초기에는 노리마키를 스시로 소개하고 한국어 김쌈밥을 병행 표기로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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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밥을 마는 데 사용되는 도구인 김밥말이(마키스). 에도 시대 후기 현대식 초밥의 원형인 에도마에즈시(江戸前寿司)에 롤 형태 초밥이 등장하면서 만들어진 조리도구로 추측되고 있다.[19] |
일본의 노리마키는 사각형으로 자른 김 위에 밥을 깐 후 길쭉하게 썬 속재료를 넣고 마키스(巻きす, 김밥말이)를 사용해 원통형으로 말아 만든다. 이는 노리마키의 영향을 받은 김밥의 제조법과도 상동한데, 노리마키가 전래되기 이전 한반도에는 이러한 조리 도구를 이용해 이같은 제조법으로 만드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았다.[20] 20세기 초 신문기사를 보면 한반도에 노리마키가 전래될 당시의 묘사를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오늘날과 제조법은 같지만 일본김과 조선김을 섞어 쓰며, 오늘날 한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베니쇼가를 사용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창경원에 꽃구경을 가더라도 점심 때는 되고 식당을 들어가면 양은 적고 비싸서 여간 불경제가 아닙니다. 집에서 준비하여 가지고 가면 편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쌈밥(스시)으로 김쌈밥(노리마기스시)이 있습니다. 재료는 아사구사노리라고 하는 두꺼운 일본김으로, 조선김으로 쓰려면 두 장을 씁니다. 밥이 뜸이 들만 하면 따로 그릇에 퍼고, 식초 한홉, 설탕 2숟갈, 소금 1숟갈, 아지노모토 1숟갈을 섞어 밥에다 비빕니다. 이것이 스시밥 짓는 것입니다. 표고를 물에 불려 간하고, 계란은 지단을 부치며, 덴부라고 하는 도미살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것을 준비합니다. 발 위에 김을 놓고 김 가운데 계란, 표고, 덴부를 놓고 말아갑니다. 만 것을 칼로 벱니다. 일본 빨간 장아찌(생강 절임)를 잘게 썰어 같이 먹습니다.
당대 상당히 비쌌을 빵, 버터, 잼 등과 일본의 아사쿠사김, 표고버섯, 덴부 등을 재료로 언급한 이 도시락 제조법은 중산층 이상의 가정을 겨냥한 것이다. 이러한 조리법은 해방 후에도 유지되어, 김밥을 쌀 때는 밥에 식초를 배합초로 만들어 간을 하였다.
‘김밥’이라는 명칭 역시 ‘후토마키’가 현지화되면서 한국에 전통적인 김 문화에 비추어 의역, 순화된 표현이다. 상기 기사 내용을 보면 ‘스시’를 ‘쌈밥’으로, ‘노리마키스시’를 ‘김쌈밥’ 등으로 순화해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동아일보 1958년 3월 29일 기사 「피크닉용 초밥」에서는 쌀 한 되로 밥을 한 후 초 1합, 설탕 1문, 소금 1문, 미미소[21] 약간을 넣는다고 하였다. 오보로(혹은 생선살 보푸라기), 박오가리, 표고, 지진두부, 시금치, 당근, 왜무짠지(다꾸앙) 등을 준비한 후 김에 밥을 놓고 속을 만다고 적혀 있어 상기 1930년의 김밥 제조법과 큰 차이가 없다. 경향신문의 1976년 4월 14일 기사 「이주일의 요리」에서도 밥에 초를 버무려 비비고, 우엉, 계란, 시금치 등을 속으로 준비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1961년 소설 『언젠가 그날(선우휘 작)』에도 화식집(일식집)의 요리사가 스시을 빚고 다시 마키즈시(巻き寿司)를 마는 내용이 나온다.# 그 당시의 김밥은 지금의 한국식 김밥보다는 일본식 노리마키에 더 가까운 초밥이었는데, 파는 식당도 오늘날과 같은 분식집이 아니라 일식집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해주셨던 김밥을 그리워해서 주방장 안유성에게 그때 어머니가 해준 레시피대로 김밥을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하니, 김대중이 소년 시절을 보낸 1930년대에도 한국에 이미 김밥이 존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김밥에서 식초로 간을 하지 않는 조리법은 1970년대 말에 나온다. 매일경제 1977년 3월 12일 기사의 「봄놀이 채비 야외도시락」의 김밥 조리법에서는 ‘다진 돼지고기를 볶은 것, 야채 볶은 것을 밥에 섞고 김을 4절로 자른 후 밥을 싼 후 미나리로 묶어 싼다’고 하여 새로운 김밥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적어도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초밥의 일종인 노리마키의 조리법 영향이 그대로 전해져 참기름이 아니라 식초를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식초를 친 밥, 즉 ‘초반’을 쓰는 경우는 마찬가지로 일본 요리인 유부초밥을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질적인 문화라는 것으로 둘 사이의 연관성은 명확해진다.
김밥에 초반을 쓰는 방식은 1980년대까지는 계속 이어졌는데, 이는 그때까지의 김밥의 위상은 일상식이라기보다는 ‘소풍갈 때 싸가는 특별한 음식’ 취급이었기 때문이다. 야외에 도시락으로 싸가는 김밥은 초반을 안 쓰면 경우에 따라 밥이 쉬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초반의 사용은 반 필수에 가까웠다. 초반의 식초 성분이 방부제 역할을 하여, 음식이 상하는걸 막아주기 때문. 소풍이나 운동회에서 먹기 편한 마끼를 싸가서 먹는 문화는 일제강점기 때 전파되었는데, 오늘날 한국에서 김밥이 소풍갈 때 싸가는 음식이라는 이미지도 이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22]
김밥에 넣는 식초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빼는 가정이 늘어났다. 그 이전까지는 김밥은 특별한 음식이라 주로 소풍 전날 집에서 김밥을 만들었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 보통 한 번 만들면 온 식구가 먹도록 양을 많이 만들고, 요리책의 일식 레시피 그대로 초밥을 사용해서 쉽게 상하지 않게 하던 것이, 냉장고가 각 가정에 보급되면서 어렵게 굳이 식초를 쓰지 않아도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식당에도 김밥이 ‘싸고 빠르게 사 먹을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이 되면서 보존식으로서의 위상은 사라지게 되고, 이에 따라 번거로운 초반 대신 일반적인 밥으로 바뀌고 신 맛은 단무지만으로 대신하게 된 것이다.[23][24] 현대 한국의 김밥과 일본 노리마키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 밥과 단무지, 그리고 참기름의 유무다.[25] 김밥과 그나마 가장 유사한 후토마키도 거의 달걀 초밥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지단의 비중이 크고, 전문점에서 고급 요리로 취급된다. #
김밥의 원형대로 초대리와 밥을 섞어 초반을 만들던 레시피는 한국 식문화와 이질적이기도 하고 노동력을 요구하는 방법인지라 80년대를 거치며 참깨와 소금, 참기름을 넣고 비빈 밥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지역과 가정의 취향에 따라 달랐다. 게다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북부 지역은 날씨가 그다지 덥지 않았기 때문에 식초가 안 들어가도 밥이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었고, 김밥용으로 가공되어 같이 파는 날 재료를 그대로 쓰는 일이 많은 요즘과 달리 (익히면 아식함이 줄어들며 식초가 들어 있어 상할 걱정이 덜한) 단무지를 제외하고는 들어가는 재료를 전부 한 번 기름에 살짝 볶아서 사용하기도 하였기 때문에[26] 아침에 만들면 점심때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초가 들어가는 것은 상하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식당이나 노점상,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뷔페식당 쪽 이었으며 그나마 오래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중에 ‘쥐는 초밥(니기리즈시)’이든 ‘마키’든 초밥이란 것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이며, 초밥을 먹을 수 있는 일식집(화식집)은 있긴 하였으나 아주 고급 요릿집으로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김밥을 파는 식당도 1980년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김밥이 대중적인 분식으로 자리잡으며 초반으로 만드는 김밥은 가정에서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27]
국립국어원에서는 1977년 이후 ‘노리마키’의 순화어로 ‘김밥’을 제시해 왔지만#, 여전히 일본의 ‘김밥요리’는 원어를 써서 ‘노리마키(海苔卷)’라고 표시하고 있다. 한국의 ‘김밥’이 일본의 ‘노리마키’에서 유래하였지만, 이제는 꽤 다른 요리가 되었기 때문에 라멘–라면, 또는 우동–가락국수의 사례처럼 구분지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
2020년 세계일보나 2022년 한국일보의 기사에서 김밥의 기원을 다루었는데, 이 기사들은 논점과 다르게 ‘김밥’이라는 음식이 아니라 ‘해조류 김‘ 자체의 섭취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한국 기원설을 소개했다. 요컨대, “《삼국사기》, 《열양세시기》와 《동국세시기》에 ‘김을 먹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일본에서는 김 섭취가 기록된 것이 한반도보다 늦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특정 요리인 ‘김밥’과는 그다지 관련 없는 전근대의 ‘김 섭취 기록’일 뿐이므로, 해당 기사에서 소개한 김밥 한국 기원설은 논점일탈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28] 기사에서는 “초기 김밥이 조선시대 쯤에 일본으로 전해졌고, 일제 시대에 새로운 형태로 한국에 역수입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밥이 한국 고유의 음식이라는 근거로 충무김밥이 있다(충무김밥은 노리마키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자적 음식이다)”와 같은 주장이 별다른 근거 없이 인용되었다.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주장을 제외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면, 전근대 한국의 ‘김쌈’ 문화가 ‘김’이라는 식재료를 공유한다는 것 외에 현재 먹는 김밥과 같은 형태의 음식이었거나, 그 원형이었음을 지목하는 사료 또는 고고학상의 근거는 전혀 발견·발굴된 바가 없다.
실제 해방 직후의 요리책이나 신문, 잡지에 실리던 김밥의 레시피는 일본의 레시피를 그대로 번역한 내용에, 일부 재료를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채소 등으로 현지화한 것이었다. 상기한 요리법을 보면, 한국에서 잘 먹지 않는 박오가리를 넣는다든지, 미미소를 넣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쌈의 한 종류인 ‘김쌈’과는 전혀 다른, 김발에 김을 놓고, 밥과 속재료를 넣은 다음, 원형으로 말아서 만드는 음식이 ‘노리마키’에서 유래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대나무발을 사용하여 판김 위에 밥을 깔고 속재료를 넣어 말아 먹었다는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